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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성인가? 공공성인가?

[문화/하다말다]미술장식품인가? 공공미술인가?

벼리 | 기사입력 2005/06/21 [07:19]

예술성인가? 공공성인가?

[문화/하다말다]미술장식품인가? 공공미술인가?

벼리 | 입력 : 2005/06/21 [07:19]

공정한 심사 끝에 성남아트센터에 설치될 조형물들이 선정되었다. 그 동안 각종 굵직한 심사에서 불공정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성남시였기에 모처럼 보여준 ‘투명행정’ 사례가 무척 돋보인다. 무엇보다 섬세의 정신, 꼼꼼한 일처리가 요구되는 문화행정에서 보여준 긍정적 사례라는 점에서도 높게 점수를 매기고 싶다.

▲이 조각의 이름은 \'조각괴물\'이란 멋진 이름이 헌정되었다.     © 2005 벼리

시에 상설심의기구로서 운영중인 미술장식품 심의위원회의 있을 수 있는 ‘시샘’(?)을 의식하지 않고 엄격한 인선기준을 적용한 별도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심사의 공정성을 기했다. 행정운영에서 유연한 사례로도 기록될 만하다. 심사 자체만을 보면 이번 심사는 그만큼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백현유원지 우선사업자 선정과정에서 이대엽 시장이 구설수에 오른 경우나 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선정과정에서 서효원 전 부시장이 역시 구설수에 오른 경우를 기억해보면 이번 심사는 무엇보다 먼저 공직자들이 거울삼을 만한 일이다. 각종 심사에 주민의 대리인으로 참여하면서도 식견의 부족은 물론 탐욕과 위선의 태도를 종종 보여준 일부 시의원들도 찡하게 와 닿는 바가 있을 줄 안다.

이런 교훈적인 맥락은 그만 짚어보고 이번 미술장식품 심사를 계기로 공직사회에서 간과하고 있는 지점을 건드려보고 싶다. 그것은 이번 심사가 아직도 시민의 공공장소에 조형물의 일방적인 제작, 설치로 나타나는 이른바 예술성을 가장한 미술장식품제도라는 제도의 운영내용과 그 산물에서의 ‘공공적 한계’에 관한 것이다. 이번 아트센터 미술장식품 심사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한계는 정부가 ‘모방의 심리’에서 미국과 서유럽에서 실시되고 있는 제도를 도입해놓고도 아직도 무늬뿐인 미술장식품제도를 제대로 손질하지 못하고 있다는 제도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핵심은 미국과 서유럽의 경우 정부부문부터 모범을 보인 그 공공적 마인드가 이 나라 정부부문에는 여전히 빈 자리로 남아 있다는 데에 있다. 미술장식품제도의 운영에서 앙꼬가 빠져 있다는 지적이다.

하긴 근래 일부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제도개선 노력이 없지 않다. 현재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는 의원발의 형태로 ‘미술장식품’이란 용어를 제도의 본래 취지에 맞게 ‘공공미술’로 바꾸고 국가, 지방정부가 건축주가 될 경우 민간부문보다 더 쓰도록 하자(건축비용의 1% 이상)는 개정안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제도개선 노력은 미술장식품제도가 공공미술제도로 거듭나기에는 약발이 거의 없다. 왜 그런가? 공공미술제도의 본래 취지는 제도운영의 전 과정에서 ‘돈(공공지원금), 장소(공공장소), 관객(공중, public audience), 내용(공공적 맥락), 목표(시민참여지향) 등에서의 공공적 성격’(성완경, 공공미술과 대중참여)을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간 미술판, 문화판의 공공미술에 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온 노무현정부가 최근 마련해 제시한 개선안은 주목할 만하다. 건축주가 건물에 미술장식품을 직접 설치하는 대신 공공미술기금을 내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하거나 자치단체장에게 설치 대행을 의뢰하는 방식도 열어주고 있고, 문화관광부 산하에 공공미술진흥위원회를 두고 공공미술정책과 설치작품을 기획, 심사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의원들보다 몇 걸음 앞선 내용들이다.

이런 정부안에 대해 기존 미술장식품 시장에 깊숙이 개입해온 일부 미술단체들은 개정안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이들의 반대논리는 “미술장식과 공공미술은 다르다”는 것인데 한마디로 자신들의 철밥통, 미술장식품제도를 통한 기득권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 같지도 않는 억지요구인 것이다. 제도개선 노력이 그만큼 어려운 것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의 활발한 제도개선 노력을 주목하면서 제도의 본래 취지를 염두에 두면 비록 제도개선 이전이라도 국가, 지방정부는 공공미술제도의 핵심인 공공적 의미와 가치를 민간부문보다 앞장서서 실천할 의무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는 주민자치, 주민참여를 핵심으로 하는 지방자치의 원리에서 봐도 그렇고 시장경제체제 아래에서 오히려 정부부문의 역할이 계속 증대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 같은 공공적 의무만 제대로 자각해도 국가나 지방정부는 공공미술을 제한하는 현행 제도 아래에서도 시민과 함께 다양한 방식을 통해 공공적 접근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시민과 함께 하는 공공미술의 주체로 충분히 나설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미 미술판, 문화판에서 미술장식품 대신 공공미술이란 개념은 일반화되어 있다. 또 정책과 담론 차원의 공공미술 논의에서도 조형물이 예술이기 때문에 공공미술이 된다는 논리는 거부된 지 이미 오래다. 오직 미술장식품제도에 참여해 미술장식품 제작, 설치행위를 기득권으로 간주하는 세력만이 일껏 귀를 막고 있을 뿐이다. 이런 시점에서 정부부문이 앞장서는 것은 절실한 시대적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공공미술에서 예술성과 공공성의 관계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두자. 제도의 원리, 개선방향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논의거리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문맥은 작가라는 개인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중받는 것이고 그것과 그 성과물은 예술제도상으로 미술관에서 보장받는다. 예술가를 위해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이 시민의 장소인 공공장소에 등장할 때 절대적으로, 우선적으로 요구받는 존립의 조건은 예술성이 아니라 '공공성'이다. 공공성이 상위개념이며 예술성은 하위개념이다. 그리고 그 공공성에 예술가의 몫은 일부이며 예술성은 단지 매개적 가치만을 지닌다. 분명한 원칙이다. 그러나 이번 심사 역시 조형물의 제작, 설치라는 그 결과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여전히 예술성이 우선하고 공공성은 뒷전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공공장소를 점령하고 있는 그 흔해빠진 모뉴멘트 개념의 조형물들은 사실은 미술관의 조각들이 아무런 맥락도 없이 ‘뻥튀기’되어 등장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공공장소에 뜬금없이 ‘텀벙(Plop art)’  뛰어들어 외로운 절대권력자처럼 대좌 위에 놓여 있거나 시민의 접근을 가로막는 예술적 표지물일 뿐이다. 이것은 예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술이 아닌 예술의 착각이라는 것이다. 공공미술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예술을 가장한 사기에 가깝다.

공공미술은 예술보다는 오히려 문화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시각이다. 작가주의를 속성으로 하는 예술과 다르게 시민적 공유와 연대를 속성으로 하는 문화가 공공미술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데에는 훨씬 더 유용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이야말로   ‘관객지향, 지역적 맥락 지향, 사회적 참여 지향, 탈미술관 지향, 거리의 문화 지향, 의미 지향 등의 속성’(성완경, 같은 글)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공공미술을 들여다 볼 때 예술의 차원보다는 문화의 차원에서 더 잘 읽혀진다. 그런데 거리의 미술장식품들을 보자. 거기엔 문화가 없다. 너나없이 떠들어대는 문화의 세기에 정작 시민들이 보고 싶고 누리고 싶은 문화가 없는 것이다. 미술장식품제도가 시민들로부터 거세게 비난받는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가 의미있는 문화의 주체로서 나설 경우 이번처럼 5억원이라는 시민의 막대한 세금을 들여 공공장소인 성남아트센터에 시민이 향유하게 될 공공미술을 행위할 경우 먼저 해야 했을 일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목표로, 어떤 방법을 통해, 어떤 공공미술행위를 할 것인지를 지역주민에게 묻는 일이다. 이것이 변치 말아야 할 공공미술의 출발이다.

특히 ‘지역문화의 관점’에서 지역과 지역주민의 특성을 차별화하는 ‘정체성’을 모티브로 목표와 방법, 행위에 걸친 공공미술행위의 전체과정을 규제하는 방향과 개념 설정만큼은 지역의 몫으로 돌렸어야 했다. 설령 현행 제도상의 한계로 최종 마무리작업을 조형물 행태로 유명한 조각가가 한다고 해도 말이다.

민선1기 당시 오성수 전시장이 성남구시가지로 들어오는 약진로에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인공폭포와 조각을 설치한, 이상한 공원을 조성한 일이 있었다. 그 공원에 설치된 인공폭포와  조각품들은 지역 내 k대학의 조형연구소라는 곳에서 했다. 꽤 많이 벌은 줄 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오시장의 '문화마인드'(?)를 받들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98년 성남지역 전역에 걸친 미술장식품 실태조사 결과에서 그들의 행위는 지역사회에 대한 무지와 무시, 공공미술에 대한 반대논리의 합작품이었음이 밝혀졌다. 그 곳의 조각을 하나 끄집어내 미술판에서 그것이 어떻게 읽혀졌는지 하나의 사례로 소개해둔다.

“개발도상국 혼성양식의 특유하고도 기괴한 유사-초현실주의를 보여주는 이 조각은 매우 외설스러우면서도 전혀 에로틱하지 않다. 오히려 유전자조작시대에 공상과학영화가 즐겨 다루는 그로테스크한 상상적 이미지, 아마도 크로넨버그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들에 가깝다. ” (강수미, 국내 공공미술의 베스트와 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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