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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은 떼거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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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은 떼거리가 아니다

〔벼리의 돋보기〕‘샐러리맨의 신화’라니?

벼리 | 기사입력 2007/09/28 [08:29]

샐러리맨은 떼거리가 아니다

〔벼리의 돋보기〕‘샐러리맨의 신화’라니?

벼리 | 입력 : 2007/09/28 [08:29]
재일한국인 사학자 이성시는 고대사 서술에 ‘우리나라……’와 같은 구절은 있어선 안 된다고 썼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 ‘우리나라’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의 역사가 국민 창출의 이야기가 되어 ‘이데올로기로서의 문화론’으로 전락되었다고 개탄한다. 뛰어난 그의 책 『만들어진 고대』에 나오는 이 같은 지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사가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질서지워진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고대사는 단수의 역사 곧 국사이거나 국사로 수렴되는 역사가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없는 이유는 고대의 역사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역사들의 역사, 복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이전 국민이나 민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사는 국민국가적 현상일 뿐이다. 곧 우리를 국민으로 묶기 위한 하나의 이야기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대’일 뿐이다. 그것은 다양한 차이들을 하나로 묶으려는 국민국가의 현재적 욕망이 투영된 결과일 뿐이다.

국민국가, 그 이후의 역사는 어떻게 구축되는 것일까. 현실의 다양한 이야기들 중에서 어떤 것은 동질적이라는 이유에서 선별되고 어떤 것은 이질적이라는 이유에서 삭제되는 그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매체의 역할이 아닐까. 책, 신문, 잡지, 방송, 심지어 인터넷이 아닐까. 매체의 메시지가 아닐까. 매체자본주의 또는 언론자본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나를 우리로, 더 큰 주체로 편입시키고 고착화하는 계몽의 도구들, 계몽하는 환각의 도구들.

▲ 만들어진 샐러리맨 곧 특정한 집합적 표상으로서 구축된 샐러리맨이 아니라 각자 자기 삶의 독특한 이유를 근거로 자기 미래를 창조하는 샐러리맨이 진짜 샐러리맨일 것이다.  사진은 27일 서울 신촌 한 카페에서 온라인 경영 커뮤니티 연합회 소속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진 등과 정책 간담회를 개최하고 있는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후보.     © 성남투데이

대선국면에서 이명박 후보의 개인적 성공담이 이른바 ‘샐러리맨의 신화’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이 성공담은 어느 새 사적인 것에서 공적인 것으로 격상되었고, 그의 대통령 자질을 가늠하는 중요한 일화이자 척도로 자리를 잡은 것 같다. 볼 것도 없이 그와 한 패거리가 된 매체들을 통해서, 매체의 기술자들을 통해서다. 샐러리맨들로 하여금 ‘나도 이명박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그와의 동질성을 환각케 하고, 그럼으로써 샐러리맨들의 지지를 이명박에게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정치판은 정치판이 아니다. 더 이상 대선판은 대선판이 아니다. 역대로 이런 정치, 이런 대선판이 과연 어디 있었을까. 희화화 그 자체다. 이런 우스꽝스러움으로 인해 앞으로 국가의 장은 전무후무한 의사 샐러리맨의 신화를 만들어낼 코미디 마당으로 변해버리지 않을까. 그렇다. 대선이 무의미해졌다. 왜, 무엇 때문에 대통령을 뽑나. 차라리 성공한 샐러리맨 중 한 사람을, 그가 저질이든 말든 따지지 말고, 대통령으로 채용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이명박의 성공담은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다. 그에 대한 샐러리맨들의 공감 역시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에 동의하는 샐러리맨들의 몫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적인 영역, 국가의 장에서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의  성공담의 사회적 의미는 특정한 개인의 냉혹한 경쟁과 승리, 그리고 막개발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속한다. 게다가 과거의 특정한 이야기일 뿐이다. 샐러리맨 중 누군가 이 특정한 과거의 이야기에 매달리는 한, 새로운 미래는 찾아오지 않는다. 

▲ 대선판에서 만들어진 특정인의 샐러리맨의 신화를 유포하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샐러리맨을 만드는 매체자본주의, 언론자본주의의 벽을 돌파해야 한다. 샐러리맨들이 그것을 돌파해야 한다.     © 성남투데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해야 할 미래를 특정한 과거의 이야기에 붙들어둘 수 있단 말인가. 과거의 성공담에 얽매이는 것은 정확히 실패를, 죽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삶의 환경이 과거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성공은 창조하는 것이지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례의 하나를 문국현은 보여주지 않았는가. 창조의 과정에서는 실패조차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성공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는 의미만으로도 그렇다.

샐러리맨은 샐러리맨이지 유권자가 결코 아니다. 만들어진 샐러리맨 곧 특정한 집합적 표상으로서 구축된 샐러리맨이 아니라 각자 자기 삶의 독특한 이유를 근거로 자기 미래를 창조하는 샐러리맨이 진짜 샐러리맨일 것이다. 이런 샐러리맨이라면 사적인 미래의 모색을 공적인 장, 국가의 장과 엄격히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매체자본주의, 언론자본주의에 의해 샐러리맨이라는 집합적 표상으로 포섭된 샐러리맨은 냉정한 유권자로 자기 모습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양극화, 복지, 실업난, 민주주의, 공동체, 남북공존 등은 국가와 사회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고 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문제들이다. 이들 문제들과 대적하는 일에서 문제를 제대로 설정하고 그 해법을 모색하는 후보와 그렇지 못한 후보를 냉정하게 가려내야 한다. 복잡할 뿐 아니라 이질적이기까지 한 이런 사회적, 국가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경제라는, 그것도 과거의 경제라는 이미지 하나로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위해 대선판에서 만들어진 특정인의 샐러리맨의 신화를 유포하고 이를 통해 만들어진 샐러리맨을 만드는 매체자본주의, 언론자본주의의 벽을 돌파해야 한다. 샐러리맨들이 그것을 돌파해야 한다. 동시에 그 돌파는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문제들에 대한 각자가 가진 이해와 소신에 따른 다양한 균열의 선들을 따라서다. 샐러리맨은 결코 가축떼와 같은 떼거리가 아니다.

만들어진 샐러리맨이 아니다. 각자 자주적인 판단의 능력, 엄중한 심판의 권리를 가진 유권자로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정치가, 대선이 우스꽝스럽게 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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