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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있어 그 일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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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있어 그 일이 일어난다

〔벼리의 돋보기〕‘창의 귀환’의 의미

벼리 | 기사입력 2007/11/04 [22:39]

그 사람이 있어 그 일이 일어난다

〔벼리의 돋보기〕‘창의 귀환’의 의미

벼리 | 입력 : 2007/11/04 [22:39]
▲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출마 선언도 하지 않았는데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2위가 나오는가 하면, 지지자들의 출마 촉구도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른바 ‘창의 귀환’으로 대선판이 요동치고 있다.     © 성남투데이
이른바 ‘창의 귀환’으로 대선판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출마 선언도 하지 않았는데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2위가 나오는가 하면, 지지자들의 출마 촉구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의 대선 출마가 확실시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대선판은 물론 충분히 예상되던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승리 역시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개 속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정치의 장 특히 선거의 장에서 ‘갈등’이란 동학이 얼마나 중요한 변화의 요인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현상만큼이나 역시 정치도 생물, 매우 역동적인 생물인 듯싶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창의 귀환에 이명박 후보 측은 대선자금 공개 운운하며 사실상 그의 출마 저지 입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죠. 그러나 이명박 후보 측은 왜 창의 귀환이라는 사태가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침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동영 후보 측은 겉으로는 이미 선택이 끝난 사람이라며 그의 출마를 코미디로 폄하하지만 실은 ‘삼자구도’를 예상하며 반기고 있습니다. 글러먹었습니다. 코미디면 코미디지 코미디를 삼자구도라는 치졸한 셈법으로 연관시키다니요. 상대 후보와 당당하게 붙어 이겨보겠다는 자신감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주류언론의 당혹감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이명박 후보의 대선 승리를 기정사실화하고 충실한 나팔수 노릇을 해왔으니까요. 그들은 이 전 총재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위배하고 있다, 정권교체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희망을 저버리고 있다, 운운하며 ‘이회창 때리기’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의 언론 상황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류언론은 단순한 권언유착의 수준을 넘어 이미 정당정치를 대신할 정도의 미디어권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정당들이 정치적 권위를 상실한 정도에 반비례해서 익명성을 무기로 하는 조작에 가까운 ‘여론’을 만들어내고, 여론정치를 통해 대중에 대한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요.

정치라는 장의 고유한 특성, 그리고 정치라는 장에 적용되어 왔던 우리의 고유한 가치의 특성을 고려할 경우, 창의 귀환은 참으로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정치라는 장의 고유한 특성이란 그것이 인격들이 충돌하는 갈등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정치는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의 세계입니다. 정치의 장에서는 자기의 가치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지요.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기의 가치를 내세우고 다른 가치와의 우열을 따지는 것, 가치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정치의 장은 갈등의 양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지요. 진정한 정치의 장이라면 우월한 가치들을 선양하는 영웅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 갈등과 가치투쟁은 인격적 갈등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정당적이거나 사회계급적적인 차이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특히 대선판에서 그렇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비록 자의반 타의반으로 서양식 대의제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정치의 장을 펼치고 있지만 그 정치의 장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나 사유는 아직은 서양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치의 장을 대하는 우리의 가치는 아직도 서양화되지 않은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 사람이 있어 그 일이 일어난다’는 가치를 정치의 장에 투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의 가치의 고유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몸과 몸짓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듯이 그 사람과 그 사람으로 인해 일어나는 그 일이 둘이 아니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겉치레나 말, 재주나 능력과 같은 그 일 곧 몸짓보다는 여전히 그 사람 곧 그의 삶 자체로 드러나는 몸이 중요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몸짓이 아무리 진짜처럼 보여도 몸은 가짜일 수 있다는 뜻이죠.

우리가 받아들인 서양식 대의제의 주요 기제인 정당들이 단순히 사회계급의 차이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도 이런 고유한 가치가 우리의 몸에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당들이 사회계급적 이익의 정치적 대변기구로만 설명된다면, 더구나 지금처럼 양극화가 극심한 양상을 보이는 상황에서 현재와 같은 괴리가 심한 각 정당별 지지율 상태는 설명이 도저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우리의 정당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된 것처럼 수도 없이 창당과 해체, 합당과 분당을 거듭하는 흉칙한 정당의 몰골도 설명이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있어 그 일이 일어난다’는 우리의 고유한 가치를 대선판이라는 가치투쟁의 장에 투사해온 우리의 태도와 사유는 그 동안 외면당해 왔습니다. 이명박 후보를 지원하는 주류언론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 사람에 대해 바른 것과 삿된 것을 구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문제인 이명박 후보와 관련된 도덕성 문제나 각종 의혹들이 여전히 검증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찍겠다는 유권자들 때문입니다. 이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몸과 몸짓을 떼어놓고 보거나 몸짓을 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로 사회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우려할 만한 비상한 사태입니다. 이번 국감에서도 드러났듯이 가치투쟁의 장에서 이른바 ‘이명박 검증’을 결사 저지하고 나선 한나라당 의원들 때문입니다. 어찌 정치판에 가치투쟁을 벌이는 영웅적인 행위들은 보이지 않고 이런 똘마니짓만 난무하는지요.

정치라는 장의 고유한 특성, 그리고 정치라는 장에 적용되어 왔던 우리의 고유한 가치의 특성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정치의 장은 가치투쟁의 장이라는 것, 정치의 장에 투사되는 우리의 고유한 가치는 ‘그 사람이 있어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다른 곳도 아닌 보수진영에서 발생한 ‘창의 귀환’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의 귀환은 바로 그 사람과 그 일이 떼려야 뗄 수 없으며, 그 일보다 그 사람이 중요하다는 가치를 다시 상기시키고 그 의미와 중대성을 정치적으로 평가받는 중대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만, 이회창 전 총재의 출마는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고, 무시할 수 없는 정치적 힘을 얻을 것입니다.

이명박 후보 측의 침묵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 “당선이 곧 면죄부는 아니다”
  • 이 당선자의 ‘불안한 일성(一聲)’
  • 대선 결과는 불안한 후보의 선택
  •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대통령 당선
  •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당선 ‘유력’
  • “이 정치적 냉소를 어이할꼬?”
  • 최악의 후보만은 막아야
  • “부정부패에 맞서 희망을 선택하자”
  • “도덕성 의심스런 이 후보 사퇴해야”
  • “부정부패 후보 사퇴만이 길이다”
  • 정용한은 용감했다(?)
  •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 자격이 없다
  •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사퇴해야”
  • “이명박, 대선후보 아닌 범죄 피의자”
  • 한) 이명박 후보 사퇴촉구 여론 ‘확산’
  • 시민들이 ‘이명박 문제’ 제기해야
  •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 “누가 까마귀이고 백로인지 가려야”
  • 원숭이 같은 유권자들
  • 노동자운명 책임질 대통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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