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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성남의 향원(鄕愿)은 누구인가?

‘향원의 전성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언론인부터 나서야 한다

한덕승 | 기사입력 2011/04/22 [08:52]

이 시대 성남의 향원(鄕愿)은 누구인가?

‘향원의 전성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언론인부터 나서야 한다

한덕승 | 입력 : 2011/04/22 [08:52]
▲ 한덕승 기획편집위원     ©성남투데이
조선시대에 수령을 속이고 양민에게 피해를 입히는 촌락의 토호를 보통 향원이라 불렀다. 백성에게 가야 할 환곡이나 공물을 중간에 착복한다든가, 무분별하게 토목사업을 일으켜 백성에게 폐를 끼치는 탐관오리와 그와 결탁한 토호들 말이다. 이런 뜻의 향원은 그 탐욕과 잔악성이 겉으로 드러나기에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향원의 폐해는 그치지가 않았다.
 
예전과 달리 민도가 높고 정보가 개방된 요즘에는 시민에게 패악 질을 하거나 노골적으로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이 설 자리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성남의 역대 수장들은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민선4기의 수장과 일부 공무원들은 딱 조선시대의 탐관오리 수준이었다. 그들이 결국 간 곳은 철창이다. 그러나 그 폐해는 고스란히 시민의 몫으로 남아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런데 공자는 <논어>에서 향원(鄕愿)을 덕(德)을 훔치는 자라 했고, 맹자는 향원을 덕을 해치는 사람, 즉 사이비라 했다. 공자와 맹자가 말하는 향원은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탐관오리나 토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향원은 한마디로 ‘관계가 두루 원만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왜 이런 향원이 사이비란 말인가?

향원은 그 누구에게도 욕을 먹지 않으면서 두루뭉술하게 관계가 좋다. 누구하고나 잘 어울린다. 사교성과 친화력이 좋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환심을 산다. 겉으로 보면 덕이 있어 보인다. 성실하고 청렴하게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지금 시대에 태어난다면 시의원이나 국회의원은 ‘따 놓은 당상’이지 싶다. 어쩌면 지금의 선출직 정치인들은 향원을 자신의 이상적 롤 모델로 삼고 행동하지 않는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그런데 향원의 실상은 다르다. 이들은 ‘아니오’할 때를 모른다. 자신의 입장이 명확하지 않기에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다. 인습대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자리보전이 중요하다. 명망 쌓기와 인맥 만들기에만 신경을 쓴다. 그러면서 암암리에 잇속을 챙긴다. 공자와 맹자가 향원을 경계한 것은 이들의 패악이 쉽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겉과 속이 다른 세련된 속물이다. 서양에서는 이들을 ‘스노브(snob)’라고 불렀다.

우리 사회는 점차 세련된 속물이 성공하고 인정받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모두가 향원이 되려고 한다. 세련된 속물이 득세하는 곳은 정치적 좌우가 따로 없다. 심지어는 시민사회도 이런 경향성이 나타나고 있다.

성남도 예외는 아니지 싶다. 아니 오히려 양상이 심한 것 같다. 많은 지역 언론인들이 할 말을 안 하고 있다. 냉철한 이성은 술자리에서만 작동된다. 공론의 장에서 책임 있게 발언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길들여졌는가. 아니면 세상이 달라졌다는 말인가. 정치권력의 채찍과 당근이 두려우리라. 독자적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시비비를 가린다는 것은 언감생심일 수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럴 텐가.

언론인들이 선이 분명치 않다. 낄 곳과 가릴 곳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얼굴을 내민다. ‘먹고사니즘’이 중요하리라. 알량한 영향력이 중요하리라. 명예도 중요하리라. 그러나 이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지역 언론이 지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갈 것이다.

성남 지역의 정치, 경제, 종교, 교육, 문화, 예술, 복지 등 곳곳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향원들의 전성시대’에 반격을 가할 때가 되었다. 세련된 속물이 지배하는 시대를 끝내기 위해서는 향원이 되어 가고 있는 우리 언론인부터 ‘탈향원화’하는 결기와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혼자 힘들면 같이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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