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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협동조합 흐름과 오늘의 모습

생활협동조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한 연재①

오인호 | 기사입력 2009/11/02 [08:11]

생활협동조합 흐름과 오늘의 모습

생활협동조합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한 연재①

오인호 | 입력 : 2009/11/02 [08:11]
<한살림성남용인생활협동조합>에서는 생활협동조합의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4회에 걸쳐 <2009 한살림성남용인 생협학교>를 열었다. 여기에 참석하지 못한 많은 성남시민들을 위해 <성남투데이>에서는 생협학교 강좌를 요약정리 하여 4회로 나누어 연재보도 할 예정이다. 생활협동조합이 우리에게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편집자 주>
 

협동조합의 시작

협동조합의 시작을 말할 때 주로 영국의 로치데일 협동조합이 시작됐던 1800년도 영국으로 먼저 되돌아간다. 1800년도 영국 사람들은 거의 농촌에서 살았으며 농노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땅을 소유한 영주가 자신의 땅에 공장을 세우며 농민으로부터 경작지를 빼앗는 일이 생겼다. 먹고살 길이 없어진 농민들이 도시로 올라와 노동자로 변신했다.

맨체스터 가까이에 로치데일이라는 도시가 있었다. 이 도시도 산업화 진행에 따라 농민이 노동자로 바뀌어갔으며 인구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로치데일에는 방적 산업이 발달했다. 당시 영국에서 발간한 신문이나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6개 소식이 있다.

①기록상 5세부터 일을 한다. 14세 이하 노동금지가 내려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②노동시간이 16시간이었다. 즉 잠자는 시간을 빼면 모두 노동시간인 셈이다. ③임금이 혼자 세 끼 먹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네 식구 모두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④고리대금업이 발달했다. ⑤식품사고가 많이 났다. 당시 영국신문에 하루걸러 나오는 기사로 빵을 중량과 가격을 속이는 사건이 있었다. ⑥공동체를 만드는 운동이 번성해 협동조합 결성 소식이 많았다.

이뿐 아니라 1843년에는 노동자들의 파업기사가 많이 실렸는데 해고된 사람들의 해결책은 협동조합이었다. 로치데일 방적공장에서 128명이 해고되어 이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한 달에 3천 원씩 12달 내는 식으로 출자 약정을 하고 돈을 모아 1년 뒤인 1843년 12월, 요즘 소비자협동조합과 유사한 협동조합을 결성했다. 빵, 밀가루, 소금, 약간의 고기로 먼저 시작했다. 

▲ 한살림에 대한 카톨릭 신문의 기사 사진     © 오인호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발달하면서 소비자 주권이 강조된 협동조합이 시작됐지만 이후 시장지배율이 넓어지고 거대 유통업체와 경쟁하면서 파산하기도 하고 주식회사로 바꾸기도 한다. 이리하여 유럽의 협동조합은 초기 근대 협동조합 전통이 60~70년대 절정에 이르렀다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규모 협동조합이 발달한 이탈리아와 비정부기구로서 역할을 하며 다국적 유통업체인 까르푸를 인수하기도 한 스웨덴이 그 전통을 잘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 생활협동조합

우리나라의 협동조합 역사는 일제 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9년 3.1운동 전후로 일본 유학생들 중 뜻있는 사람들이 국내에 들어와 YMCA, 천도교 협동조합, 조선공제회를 만들었다. 대부분 소비자협동조합의 형태였다. 조만식 선생의 물산장려운동도 이것과 관련 있다. 

1930년대에는 97개의 협동조합 중 73개가 소비자협동조합이었다. 1938년 만주전쟁 이후 일본의 치안유지법이 발효되면서 탄압이 시작됐고 이후 협동조합이 사라졌다. 1950년 이후에는 농협과 같은 관제협동조합 이외에는 없었다.

해방 이후 여운형 선생의 인민위원회와 함께 마을 곳곳에서 경제조직으로 협동조합이 만들어지나 한국전쟁 전후로 흐지부지 되었으며, 남아있는 것은 농협이었다. 1957년에 농협중앙회를 만들어 정부가 농업을 지원하는 형태였는데 1987년 이전까지 정부가 농협간부를 임명한 관제협동조합이었다. 

생필품을 나누는 생활협동조합의 시작은 1979년 평창 대하군 신리에서 만들어진 신리소비조합에 둔다. 1980년대 초까지 이러한 생협이 70개가 생겼다.

도시형 생활협동조합은 1985년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이 최초다. 오늘날 '원주 한살림'이다. 당시 57명이 출자하여 쌀과 유정란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때 안양에서도 소비자협동조합이 결성되었는데 오늘날 바른생협이다. 1986년에는 원주소비자협동조합운동에 참여했던 박재일 회장이 제기동에서 한살림농산을 개설하면서 도농상생, 농업살림, 생명살림의 협동조합을 펼치기 시작했다.

생활협동조합이라는 말은 1989년부터 시작했다. 보통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라고 불리던 것을 '소비자'를 빼고 이름을 붙였다.

 90년대 초반에는 여러 생협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점차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지만 유기농업 생산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1996년 당시 420명 정도가 유기농업인이었다. 하지만 1998년 친환경농업육성법이 제정되어 유기농업이 활기를 가졌고, 1999년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이 만들어지면서 정책적으로 생협이 지원을 받는 합법적인 기구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점차 조합원 수는 늘어나지만 생산지는 늘지 않고 생활협동조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생협을 이용하는 조합원도 늘어 생협운동도 어려움을 겪어왔다. 
▲ 한살림 서현 매장 개장 모습     © 오인호

한살림생명활동 협동조합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과식 과잉은 좋지 않다고 했다. 유기농산물을 많이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검약이라는 생각에서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나누어 먹자는 것을 강조했다. 따라서 생협에 가입할 때 내는 출자금도 나중에 찾아가는 '내 것'의 의미가 아니라 공동의 자본이라는 생각이 필요하다. 내 것을 내어 모두의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이게 출자의 진정한 의미다. 내 것 내가 챙기겠다고 하는 것은 한살림이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한살림 물건만 취급하면 행복한가? 일상적으로 필요한 것이 많이 있다. 노인, 건축, 학교, 등 다양한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합원과 항상 이야기를 나누고 이웃 친구들과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한살림, 문화생협, 노인생협 의료생협 등 다양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공동의 자산을 만들어 공동의 일을 만들어간다면 수평적으로 동심원을 만들며 좋은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다.  / 강사 : 김용우 무위당 좁쌀만인계 사무국장(전 원주 상지대학교 국제친환경유기농센터 연구기획실장/전 이우학교 교사/원주협동조합운동협의회 지역농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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