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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홍이

벼리 | 기사입력 2005/06/13 [01:54]

산홍이

벼리 | 입력 : 2005/06/13 [01:54]

▲ 그이의 표정을 보라, 그이가 쏟아내는 땀을 보라. 그이의 열정을 보라! 송상욱 시인이다.     © 2005 벼리

“명기들에게 무엇을 배우랴. 그들을 배워 대범한 듯 민감하고, 안돈(安頓)한 듯 방황하고, 묶인 듯 자유롭고, 요요(搖搖)한 듯 정숙하여라, 먼 생각에 짧은 말로 절제하고, 깊은 사모의 정을 옅은 미소 속에 선뜻 흘리며, 뭇 남성의 틈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문즉 절사(節死)하여라.”(김영민, 名妓를 그리며)
 
지난 토요일 서울 인사동에 있는 어느 갤러리에서 한 시사동인(詩舍同人)이 시화전을 겸해 거나하게 놀이판을 벌였다. 전시 폐막시 벌이는 신나는 놀이판 경험은 있지만 전시를 겸한 놀이판의 경우는 처음이다. 경향 각처에서 재사(才士)들이 모여든 그 놀이판에 성남의 재사들 곁에 끼어 참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밤이 깊을수록 전시보다는 오히려 그 팽팽한 분위기로 일관된 놀이판에 사람들이 압도되어 버렸다.
 
중후한 목소리로 시낭송하는 실내인테리어 전문가, 강원도 오지에서 실제 된장을 담구고 그 된장맛 나는 소리로 자신의 시보다 백번 뛰어난 시낭송 솜씨를 드러내는 여성시인, 연륜 있는 나이에 나비로 날아다니며 긴 치마폭을 들어올리던 무용가, 내가 좋아하는 하모니카 소리를 들려주며 어쿠스틱 기타를 뜯으며 재즈적 즉흥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언더그라운드 가수, 독창적인 퍼포먼스를 한바탕 늘어지게 흩뿌리는 운수납자, 청아한 대금소리로 시낭송의 반주를 해주고 감칠 맛 나는 단가로 막걸리판의 흥을 돋구는 국악인, 다 비운 큰 플라스틱 막걸리통을 두들기는 화가, 놀이판을 꼼꼼히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작가 등등.
 
놀이에 탁월한 재사들 가운데,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아주 인상 깊었던 이가 있었다. 이 씻을 수없는 인상은 그이가 들려준 기생 이야기로부터 비롯된다. 그이는 모인 이들 가운데 가장 높은 연배인데다가 놀이판을 깊은 울림의 징소리로 열었는데 막상 통기타를 반주삼아 내 부모세대가 즐겨 부르던 옛 가요들을 다룰 때는 그 열정과 놀랄 만한 재주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통기타는 기타 줄을 뜯는 것을 넘어 울림통까지 함께 치는 주법을 구사해 가히 내 어렸을 때나 보던 고전적인 주법을 구사한데다가 옛 가요들을 다룸에는 떨림소리와 건들거리는 소리를 어찌나 유창하게 구사하는지 가히 트로트 창법의 원형을 보여주었다.
 
그이가 부른 노래 중에 서울 종로거리에서 전설적인 기생으로 전해져 온다는 산홍(山紅?), 그 산홍이란 기생이 불렀다는 노래가 있었다. 전설적인 기생이란 ‘명기(名妓)’라는 의미이다. 처음 듣는 노래, 말하자면 일제 때 불리어졌을 옛 가요인 듯했다. 그이는 그 노래를 부른 산홍이란 기생을 기린다며, 노래하기 전 그 노래의 배경으로 산홍의 삶을 요악적으로 들려주었다. 그 애절하게 다가왔던 가사와 곡조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산홍의 삶에 관한 내러티브가 또렷하게 기억 남는다.
 
그이에 따르면 종로 바닥에서 명기로 소문난 산홍이 어느 날 젊은 맑시스트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 맑시스트가 심각한 경제적 곤궁에 처하게 되자 하는 수없이 산홍을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온갖 모멸과 고생을 겪은 산홍은 뒷날 그 맑시스트와 헤어지고 조선으로 돌아와 기생으로 생을 마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홍이 정말 사랑하는 남정네는 그 헤어진 맑시스트가 아니라 끝내 함께 하지 못했지만 따로 있었더란다.
 
그런 산홍이 부른 노래라며 그이가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기 드문 반주와 더불어 정열적으로 그 노래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나는 정신이 몽롱해져 있었다. 그날 놀이판에서 유독 인상 깊었던 그이였다. 돌아오는 길에 그 산홍이 전설적인 기생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또렷하지 않지만 그 얼굴이 내내 떠오르고 있었다. 오랜 만에 가슴 속에 환하게 달이 뜨고 있었다.
 
(산홍이, 산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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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안이라는 병
  • 유언
  • 국화차를 마시며
  •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 춘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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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은 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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