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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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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神이다

벼리 | 기사입력 2007/09/27 [00:50]

이것은 神이다

벼리 | 입력 : 2007/09/27 [00:50]
▲ 지금 나는 주워온 돌에 박힌 형상-그림 하나를 보며 온몸으로 갈애(渴愛)하고 있다.     © 2007 벼리

신을 믿는 약간의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에게 극심한 불쾌감을 주는 일이 얼마 전 벌어졌다. 아프간 피랍사태가 그것이다. 일부의 희생을 치르고 돌아온 그들이 다소 위축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서(신을 믿지 않는 어떤 이는 공항에서 그들에게 계란을 던졌다) 과연 그들이 얼마나 신을 확신하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들의 신이 물질적 존재가 아닌 정신적 존재라는 점에서 그들의 믿음은 강렬함의 정도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약한 인간이 되어버린 신을 보는 듯, 그런 느낌마저 들었다.

서양미술사에 소개되는 기독교 계열의 종교화 도판들을 보면 전지전능한 신이 중심에 있다. 인간 그리고 자연은 모두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심의 신은 인간과 흡사하다. 신의 피조물인 인간으로부터 신의 형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달리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사소한 것이 중요한 것보다 더 의미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종교화들이 예외없이 인간의 피조물인 한, 신이 아닌 신의 피조물들이 아무리 주변에 자리한다 해도 그 주변은 예외없이 신을 둘러싸고 있다. 신의 피조물들이 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순간, 곧 신의 피조물들은 결코 신이 아니며 게다가 신을 둘러싸고 있는 한,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다. 오히려 신이 신의 피조물로 간주되던 인간과 자연에 의해 만들어지는 따라서 규정되는 것을 보게 된다. 정의(定義)상 자기원인을 갖는다는 신 곧 자기 스스로에 의해서만 자신을 규정한다는 신의 정의는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이때로부터 신은 인간의 신, 자연의 신으로 돌변한다. 여전히 신이 믿을 수 있는 그 무엇일 수 있다면 이 신은 기독교식의 유일신이 아니라 인간의 신, 자연의 신 곧 토템, 샤만이거나 범신론에서의 신, 아니면 우리 식으로 말해 도(道)나 기(氣)일 것이다.

유일신보다 범신론이 앞선다는 것은 인류학적으로 실증된 것이다. 또 유일신인 기독교의 신이 정신적 실체로 간주되던 서양 중세에 신을 자연적 실체로서 보는 철학자가 생겨난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연을 신으로, 자연의 작용을 곧 변화하는 자연을 신의 작용으로 보는 스피노자가 그 경우다. 스피노자에게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었다. 신은 자연이며, 자기원인으로서의 자연은 스스로 변화를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이 아닌 자연의 피조물, 자연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러나 삶을 통해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생각하고, 인간을 그 일부로서 받아들이는 자연을 신성하게 여겨온 것은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의 오랜 전통이다. 버려진 나무를 깎아 자연의 신을 형상화하는 아프리카 사람들, 그리고 묶은 나무나 돌을 깎아 마을장승을 만들어온 이 땅의 민초들. 거꾸로 신이 아닌 법당의 불상마저 몸과 분리된 정신의 편집증 대상이 되는 것을 보고 불쏘시개로 내던져버린 선종(禪宗)의 일화들. 지금 나는 주워온 돌에 박힌 형상-그림 하나를 보며 온몸으로 갈애(渴愛)하고 있다.

“이것은 神이다.”


 
  • 高度
  • 슬픔
  • 불안이라는 병
  • 유언
  • 국화차를 마시며
  •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 춘란처럼
  • 無題
  •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 이것은 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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