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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시(錯視)는 착시일 뿐

[벼리의 돋보기] 익명의 폭로, 익명의 폭력

벼리 | 기사입력 2005/06/06 [14:17]

착시(錯視)는 착시일 뿐

[벼리의 돋보기] 익명의 폭로, 익명의 폭력

벼리 | 입력 : 2005/06/06 [14:17]

누군가 ‘쇳물처럼’이란 이름으로 댓글달기를 통해, 게시판 게시를 통해 어지럽게 삼 가닥 엮듯 벼리에게 궁시렁댔다(‘이윤수 전의원, 말이 좀 그렇다’에 붙인 댓글들 참조). 그의 어지러운 행동은 언뜻 ‘쾌도난마’(?)처럼 보인다. 글쎄?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그 저열함에 벼리는 동급으로 대하지 않으련다. 토론에서 댓글과 댓글이라는 그 '과(상호관계)'를 무시하고 제 댓글만 게시판에 퍼나르는 그 폭력적인 일방성에 대해서도 동급으로 대하지 않으련다. 그는 아직 내게 떳떳하지 않다.

그 경계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본 게 있어 거꾸로 질문을 던졌는데 그는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 접근하려는 태도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럼 관둬야지. 이 포기는 곧 토론의 상대로서 삼지 않는다는 명확한 뜻이다. 하긴 그는 먼저 ‘애정’(?)을 접는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렸다.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진 것이다. 그가 앞으로 다시 또 어떻게 나오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의’에 달려 있다. 그 자의에 대해서조차 벼리는 댓글이 아니라 '필자의 자격과 소임'으로 참여할 수 있음을 말해둔다. 이미 성남투데이에도 요청했다.

아무튼 그가 다시 또 그런 자의를 부린다면 그것을 심심한 내 삶에 이따금 끌어다가 노리개로 삼을 수도 있고 그가 말한 식이라면 '줏대 없는' 내 삶쓰기의 재료로도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사례로서 그가 벌인 행동을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읽어내는 작업 하나를 여기서 수행한다. 하긴 토론의 상대로서 포기한 이상 앞으로 ‘하고 말고’는 내 맘이다. 적당히 또는 많이 게으름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여유마저 없다면 삶이 무슨 재미가 있는가.

그 사건에서 많은 문제들을 포착해 그 문제들에 대해 이리저리 말할 수 있으나 여기선 하나의 문제만 다루련다. 그것은 익명성에 관한 것이다. 그의 행동은 우리 시대에 들어와 존재조건의 변화 곧 익명의 시대라는 존재조건의 변화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존재조건의 변화가 존재 자체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익명은 익명으로 남는다. 이 때 익명이 의미하는 바는 말 그대로 익명일 뿐이라는 점이다.

한 단어가 현실의 맥락에 놓여 있지 않는 한, 그 단어가 지시하는 바나 포함하는 가치는 없다. 이 점에서 익명이란 그저 ‘공허함’의 지시기호일 뿐이다. 그 익명의 이름으로 수행된 내용은 전혀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그것이 궁시렁이든 아니면 설령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애정의 이름으로 위장된 인신공격, 비난일지라도 사정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그 익명에 대한 대응은 속수무책이다. 가장 큰 이유는 그 익명의 무의미함, 무가치함에서 비롯된다. 경험적으로 보면 상대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일순위 방식이며 의도적이든 감정적 대응이든 같은 수준에서 적당히 상대하다가 이내 끝내고 마는 것이 이순위 방식이다. 어떤 방식이든 분명한 것은 얄팍한 전략의 소산이라는 점이다. 익명을 장점으로 구가하는 익명의 활용이 전략인 것과 다르지 않다. 다 일리는 있으나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이전투구'이리라.

이 익명성에 따른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오래 동안, 우리 시대의 몸의 성숙 정도로 볼 때아마 우리 당대에는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될 것이다. 대개 마음이 여리거나 단속의 훈련이 덜 된 사람들, 대개의 사람들이 그 때마다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는 자신을 고슴도치 움츠러들듯 남겨둘 것이다. 이 점에서 익명성을 활용한 투서, 인신공격이 종종 사법적 판단에 맡겨지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시대적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꿔 말해서 나는 익명성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식은 크게는 내 몸살이 안에서 좁게는 사유하기에서 물어온 것이다. 문제를 추출하고 대화를 시도하는 이런 태도는 삶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척도를 자신에게 구하는 내 방법에서 늘 자연스럽다. 이와 관련된 많은 논제들을 여기에 올리고 다양한 경로를 밟아 사유하고 경우에 따라선 현실적 판단도 내릴 수 있다.

여기선 다만 그 실마리가 되는 한 가지 곧 그 바탕에 깔린 논제로서 인간에 대한 관점, 태도의 문제가 놓여 있다는 것만 지적해두자. 여기서 언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이것을 포착하는 것, 확인하는 것, 사유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는 역설적으로 모든 사회적인 논제에 이 문제가 바탕에 깔려 있으면서도 그 출발과 과정과 해결의 모색에서 그것이 포착되고, 확인되고, 사유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지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인간의 문제를 이해하고 접근해온 모든 이론들을 의심한다. 의심해왔다. 교과서, 이론의 세계에서 소개되는 다기한 그것들을 나는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의심해왔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조직과 집단의 이름으로 세워진 패거리주의적 견해들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내 것이 아니다. 이 의심과 불신의 관점은 근본적인 것이다. 이 근본적인 것과의 대적에서 나는 삶을 풀어내고 살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다른 누군가도 그렇겠지만 내게 아직은 살아볼 의미, 가치를 부여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삶의 얼치기들은, 삶을 배반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데서 예컨대 공맹(孔孟)을 읽고 그것을 받아들여 공맹이 된다. 공맹이 되어 인간의 문제를 접근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에서 끌어다 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현실에서 끌어다 써도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저가 읽은 것, 저가 받아들인 것, 마침내 저가 견해로서 세운 것은 진리가 되고 원칙이 된다. 모든 사물과 현상을 재단하는 척도로서 자리잡는다는 소리다.

그 얼치기들은 아주 뻣뻣하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에 힘줄이 배인다. 소리의 톤이 높아 쇳소리가 나고 침마저 튀길 때 마치 쇳물과 같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것은 사실이다 또는 사실이 아니다고 판단한다. 이것은 맞다 또는 틀리다고 규정한다. 이것은 선하다 또는 악하다고 규범화한다.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 시비, 도덕에 관한 그 얼치기들의 태도는 '있는 그대로'라는 존재론적 기반에서 출발하고 그것을 자기척도로 삼는 내 태도와는 천리 밖, 만리 밖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판단이며 규정이며 당위의 차원 따라서 자의일 뿐이다. 그러나 그 돌은 어디로 떨어진 것인까? 연못인가? 강물인가? 바다인가? 허공인가? 떨어진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비유컨대 아직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다 썩지 않은 모양이다.

또 하나, 이런 청맹의 시선에서 실감있게 포착되는 것은 ‘렌티큘러(Lenticular)’현상이다. 이미지 작업에서 종종 쓰는 렌티큘러 방식은, 간략히 말하면 보여지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착시(錯視)효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이미지를 예리하게 읽어내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아는 이미지 생산자들은 그 각도에 ‘사실’, ‘의미’, ‘가치’와 같은 잣대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보여지는 것을 '제대로' 보게 한다.

이에 따르면 사실로 인식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의미있는 것으로 인식된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가치있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또 그 반대의 방식으로 전혀 새로운 사실, 의미, 가치의 이미지를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뒤바뀌는 것이다. 역설적인 활용인 셈이다. 전자의 작업은 이미지 생산자들에서 종종 보아왔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후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이미지 비판의 영역에서 나는 그런 새로운 이미지 생산자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부정의 논리가 지배적이다. 부정과 긍정을 넘나드는 섬세함의 정신은 아직도 설 자리를 찾는 중이다.

아무튼 사회비평적인 맥락에 있는 좋은 렌티큘러 작업을 보게 되면 역사와 사회가 그 각도의 움직임에 따라 얼마나 다른 간극이 발생하는지 잘 읽혀진다. 하긴 이 서로 다른 간극을 이원적 대립주의에 붙들린 노예들은 가령 원칙이란 원리, 다양성이란 원리를 현실의 맥락을 고려하지 못하고 자의적으로 충돌시키는 노예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보지 못한다. 이런 노예들과 동시대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운명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러나 내겐 그 운명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없지 않다. 꽤 오래동안 그런 소리들에 귀 기울여왔다. 그리고 그 운명 밖의 소리들에 내 몸은 자주 떨린다. 그것은 개인의 세계인가? 개인의 합 이상이라는 세상의 세계인가? 출세간의 세계인가? 세간의 세계인가? 이도저도 아니다. 비유적으로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세계라 해도 괜찮겠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개인의 문제이면서 사회적인 문맥으로 연결하기도 하고 렌티큘러를 부정으로도 긍정으로도 해독하는 내 태도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이따금 인간에 대한 비극을 느낄 때, 그 경우는 악인을 대할 때가 아니다. 몸살이가 아니라 의식살이, 그 핵심에서 의식 그 자체로 몸살이를 대신하는 자들을 대했을 경우다. 그 물거품 같은 상(相)의 힘이 그렇게도 의지할 만한 것인가? 이 점에서 그 의식의 포로들이, 행위의 귀결점에서 늘 도덕적 심판관의 행세로 나타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 자들은 내게 ‘바르게살기협회'의 충성스런 회원으로 보인다. 그래, 바르게 살아라. 열심히, 열심히 바르게 살아라. '중력의 신'이 그대들을 보호할지니.

나는 '삐딱이'로 길을 가련다. 아니 갈지갈지 길을 가련다. 부딪쳐 울다가 만나서 웃다가 살에 몸서리치다가, 그렇게 길을 가련다. 삶은 그렇게 살아볼 만한 것이다.

이 글에 대한 댓글 : 1) 어떤 의미에서 제식대로 가는 글쓰기가 '타겟'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어쩌랴, 아니꼽겠지만 삶쓰기가 그렇게 가는 것을. 게다가 그 타겟의 근거는 '스테레오타입이란 의미의 정치' 영역에서 이해관계를 다루는 태도의 상이함에서 나온다는 것을 어찌 모르랴. 아니꼽게 여기는 그 부류가 어떤 방식이든 그 판박이 정치의 영역에서 이해관계나 이념적 잣대를 가진 자들임을 어찌 모르랴. 그리고 그들에게 그 정치란, 이념이란 늘 그렇듯이 '전부' 내지는 '과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머리가 참 무거우리라. 그 상이함이나 과도함은, 그러나 내게 가볍기만 하다. 그 가벼움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이렇게 오면 이렇게 치고 저렇게 오면 저렇게 치리라. 그보단 게으름 피며 자주 쉬기도 하리라. 2) 칼을 든 자는 명심해둬야 한다. 그 날은 반드시 예리해야 하고 자기가 휘둘러 그에 따른 결과대로 책임질 줄 알아야 한다. 이 점에서, 아직은 구체적 언급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만, 해석의 차이를 떠나서라도 쇳물처럼은 이미 어떤 지점들에서 심각한 왜곡이 있었음을 말해둔다. 지난 시대에 가치 있었던 흐름과 실천을 왜곡한 지점들도 있었음을 밝혀둔다. 더구나 한편에선 선정적인 폭로의 정신을 기반으로 정치적 선동술을 구사하고 다른 한편에선 이러이러한 것들을 사실로서 인정하라고 자백 강요하듯 강요하고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내가 한다는 그 오만함은 과거 권력의 사찰기관과 군의 보안사가 하는 듯한 수법을 연상시켰다는 점도 말해둔다. 잊지 말아야 한다. 벼리에게 최소한의 삶의 보존을 위해 용수철과 사출의 지점이 있음을 말해둔다. 3) 쇳물처럼이 말한 모든 것은 내가 펼칠 수 있는 해석의 지평에서 엄한 공과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쇳물처럼은 구사된 각종 개념과 논리들, 그것들의 맥락상의 시야와 그 백번 옳다는 신념을 입증하기 위해 아무리 좋게 말해도 얼치기 '인상비평'의 수준에서 수행된, 지금까지 쓴 댓글들과 그 문맥, 그것을 부린 머리 큰 주인공을 열심히 궁리하고 궁리해야 하리라. 다만 머리가 더 커지거나 무거워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그럼 그 수고스러움과 피곤함에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기를 기대해보기로 하자. 벼리가 까먹고 게을러도 쇳물처럼은 포기해선 안된다. 일방적으로 먼저 시작한 그 가면놀이는 지속되어야 한다. 벼리가 죽어야 쇳물처럼이 두 다리 쭉 뻗고 쉬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벼리는 결코 고상하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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