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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도 선물을 받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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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게도 선물을 받았어요

〔벼리의 돋보기〕 선물 그리고 물물교환

벼리 | 기사입력 2007/09/23 [00:45]

고맙게도 선물을 받았어요

〔벼리의 돋보기〕 선물 그리고 물물교환

벼리 | 입력 : 2007/09/23 [00:45]
추석을 맞아 세 가지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한 가지 교환이 있었다. 우선 세 가지 선물은 소고기, 사과, 김이다. 한 가지 교환은 상황버섯이다. 부쩍 성장 중인 아들들은 벌써 제 어미와 선물받은 소고기의 일부를 맛있게 구어 먹었다. 제 주먹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빨간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먹으면서 만화책을 보는 막내아들의 모습을 흐믓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상황버섯을 본 그녀는 아들들에게 달여 먹일 것이라며 손도 대지 말라 내게 말한다.

경제적 실익 하다못해 다른 사회적 실익이라도 고려한 거래가 별로 없는 게 요즘 내 생활인지라 생각치도 않은 선물을 받은 셈이다. 선물이란 그냥 주는 것, 오직 이런 의미만이 있다. 말 그대로 선물이다. 선물을 그냥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받는 사람이 기쁜 마음으로 받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오직 그냥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선물은 결코 교환이 아니다. 받는 사람이 부담을 느끼거나 따라서 부담에서 오는 답례가 선물을 준 사람에게 1대1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경우, 그것이 특히 물건 형태라면 그것은 교환이 된다.

살림살이가 어려운 나는 요즘 무엇을 사서 선물할 처지가 되지 못 한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권력의 허가증인 구매력이 없는 경우에 해당되는, 그야말로 가난한 프롤레타리아인 셈이다. 대신 나는 선물을 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잃지 않는 한, 언젠가 또는 기회가 닿은 대로 내 방식으로 선물할 작정이다. 내 경우 그 선물이 물질적 형태와 거리가 멀다는 것도 분명하다. 왜냐하면 당분간 내 살림살이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지만 보다 중요한 내적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 경제적 가치를 상쇄하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과 대적하기도 하고, 종종 그것을 넘어서는 사회적 가치들이 온존하기 때문이다. 가치들은 가격과 양립하지 않는다. 가격을 아는 자는 가치들을 알지 못한다. 내 경우 가치는 아마 상대에 대한 사회적 유대 또는 인간적 호감이나 배려의 표현으로 드러날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굼벵이-나-도 구르는 재주가 없을 리 없고, 그것을 나는 충분히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선물에 대한 답례(?)를 하더라도, 나는 의식적으로 시간의 틈을 둘 작정이다. 이 틈이 없으면 선물과 답례가 1대1 방식으로 성립되어 따라서 교환이 되기 때문이다. 즉 거래로 전락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래야말로 자본주의가 가장 좋아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그냥 선물을 준 사람들에 대한, 그 사람들의 고귀한 사회적 행동에 대한 완전한 모독이 되는 일이다. 나는 결코 즉각적으로 답례하는 일을 하지 않을 작정이다.

모스가 쓴 『증여론』은 많은 공동체들이 증여 즉 선물을 주는데 적극적이면서도 반대급부를 되돌려주는 일에는 아닌 척 위장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즉 거래를 삼간 것이다. 심지어 증여이자 희생인 포틀래치(potlatch)의 경우 더 많이 베풀고 더 많이 선물함으로써 따라서 더 많이 잃는 것만이 미덕이라는 것도 있음을 알려준다. 이렇게 보면 증여의 의미는 삶에 속하지 경제에 속하지 않는다.

경제가 지금처럼 삶과 분리된 특별한 영역으로 나타난 경우는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증여는 그것이 삶에 속하는 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그가 지닌 고귀한 정신과 감정에서 비롯되며 따라서 고귀한 사회적 행동임이 분명하다. 이것이 증여의 의미라면 따라서 증여의 효과는 쾌락이다. 쾌락이 있기 때문에 증여하는 것이다. 선물은 선물하는 사람을 즐겁게, 행복하게 한다.

남보다 많이 가졌다면 선물할 수 있을 것이다. 남보다 많이 가졌기 때문에 선물할 수 있는 것이다. 부자가 하찮은 물건들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 부자로서 그의 쾌락은 차라리 빈곤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도 없지만 작은 물건 또는 비물질적인 선물이 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더 잘 선물한다. 증여하는 사회, 포틀래치가 최고의 미덕이 되는 사회, 이것이 바로 사람 사는 세상일 것이다.

성남투데이에 글을 보내는 나는 그 대가로 약간의 작은 돈을 받곤 하는데 이번엔 상황버섯이 함께 전해졌다. 이 상황버섯은, 이것을 전해준 기자의 말에 따르면 성남인하의료원 노조원들이 투쟁기금 및 생계비 마련을 위해 한시적으로 판매 중인 것인데 성남투데이가 배너광고를 해 준 대가로 받은 것이란다. 이것은 교환이며, 정확하게는 배너광고라는 서비스와 상황버섯이라는 재화의 교환 즉 물물교환인 셈이다.

교환의 한 형태로서 이 물물교환은 경제적 이익이라는 동기가 작용한다. 그래서 성남투데이는 배너광고를 해준 것이고 노조원들은 상황버섯으로 보상한 것이다. 이 관계는 상호적이다. 따라서 이윤은 고려되지 않는다. 교환 중에서 물물교환은 가장 오래된 거래라는 의미에서 원시적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생존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생존적인 따라서 이런 삶의 경제적인 의미와 더불어 교환되는 물건들은 완전히 사물화되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사물 속에는 인간이, 그들의 삶이 비친다. 상황버섯을 받았을 때, 오랜 기간 투쟁을 벌여온 인하병원 노조원들이 떠오르고 그들이 생계에서 처한 곤궁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공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교환할 수 있는 물건이 꽤 되는 것 같다. 손때 묻은 물건들.

교환이 지배적인 경우, 가장 전형적인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사회인데, 교환되는 것은 모두 완전한 사물로서 나타난다. 인간관계, 인간의 고귀한 정신, 감정, 행동은 모두 더럽혀지고 사라지며 사물만이 남는 것이다(노동력의 교환은 인간 자체의 교환으로 바뀌어간다. 여성의 상품화, 그리고 특히 수동적인 인간!). 사물의 의미는 결코 삶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의 사물화, 사물의 세계. 이 세계는 진정으로 끝에 도달했다.

그러나 교환이 지배적이지 않은 경우, 즉 종속적인 경제행위로 나타나는 경우 그것은 인간의 삶에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교환되는 장소의 즐거운 소동, 교환에 등장하는 인간의 삶의 교환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유용하기까지 하다. 교환이 선물에 병합되는 경제원리(생산 자체는 경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삶에 속한다)인 한, 인간의 가치는 그리 하락되지 않는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따라서 부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무너뜨린 것이 바로 시장경제라는 것은 역사에 올려진 그대로다.

인간 삶의 원칙은 자기 삶은 자기가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충족되고 남으면 선물하면 된다. 충족이 결여되어 있을 때 약간의 교환이 덧붙여지면 그만이다. 생산이 불가능한 삶은 이웃이 보듬으면 된다. 이런 삶은 충분히 가능하며, 역사상 인간은 대체로 이런 삶을 살아왔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서 이런 인간의 삶의 형태는 가족, 촌락, 씨족, 종족, 의식과 자연이 뒤섞인  공동체, 사회의 형태로 확대될 뿐 본질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오직 시장경제만이 예외일 뿐이다.

인간의 삶은 간명해야 하며 서로의 삶을 보듬는 것이어야 한다. 물물이 상품이 되고, 그것이 교환되며, 돈으로서만 표현되는 시장경제야말로 이런 삶에 정확히 반대되는 것이다. ‘부자 되세요’가 시중의 덕담이 되고 따라서 고급 승용차와 평수 큰 아파트와 하찮은 상품들의 소유가 미덕인 세상. 마침내 인간은 사라진다. 프롤레타리아가 남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시장경제는 모든 것이지만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마침내 시장경제에는 어떤 신만이, 신의 추종자들만이 남아 있다. 그 신에 대해서 시인 D·H·로렌스(1885~1930)는 <현대의 기도>를 들려준다.

전능하신 財神이여, 富를 주소서.
어서 부자로 만들어 주시고
저의 운수에 재난이 없게 하시고
저를 방해하는 자를 시궁창에 차 넣으십시오.
위대한 개새끼 財神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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